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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 균열의 틈새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안진국(미술비평)

 

“매끈한 공간은 끊임없이 홈이 패인 공간 속으로 번역되고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편 홈이 패인 공간은 부단히 매끈한 공간으로 반전되고 되돌려 보내진다. 홈이 패인 공간에서는 사막조차 조직화되며 매끈한 공간에서는 사막이 퍼지고 확장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혼합되어 있다고 해서 권리상의 구분, 두 공간의 추상적 구분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두 공간이 결코 같은 방식으로 교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리상의 구분이야말로 사실상의 혼합의 형식과 혼합의 방향(=의미)을 결정한다(매끈한 공간이 홈이 패인 공간에게 포획되어 감싸이는가 아니면 홈이 패인 공간이 매끈한 공간 속으로 융해되어 매끈한 공간을 펼치도록 해주는가?). 이리하여 동시에 수많은 질문이 제기된다.”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1440년−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907.)

 

   홈이 패인 빛과 매끈한 잔상 : 경외, 지배, 반투명

햇살이 비친다. 유리창에 부딪혀 여기저기 움푹 패인다. 움푹 패인 빛은 반투명한 그늘을 만든다. 전시장 구석에 닿는다. 태양은 서서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간다. 움푹 패인 빛과 반투명한 그늘은 서서히 전시장의 벽면에서 바닥으로, 바닥에서 맞은편 벽면으로 매끈하게 미끄러진다. 빛과 그늘은 하루에 한 번씩 전시장 전체를 느릿느릿 지나간다. 이 서정적 풍경에 불쑥 끼어드는 ‘성조기’. 열세 개의 적백색 가로줄과 쉰 개의 흰 별이 박힌 미국의 국기. 빛과 그늘이라는 서정적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데올로기적 형상이 그곳에 등장한다. <움직이는 영토>. 이 작업은 이경희 작가의 신작이다. 과연 이 작업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움직이는 영토>는 성조기를 부각시킨 작품이다. 여기서 성조기는 그냥 성조기가 아니다. 작가가 미국 뉴욕에 체류 중 맥도널드에 들렀을 때 봤던 성조기다. ‘그’ 맥도널드에 붙어있던 ‘그’ 성조기. 그렇다고 이 성조기가 일반 성조기와 특별히 다른 건 아니다. 사실상 똑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곳에서 ‘봤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본 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본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눈으로 모든 형상을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그저 보고 있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 ‘본다’라는 것은 단순히 눈의 기능을 다해 보고 있다 라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보는 것을 넘어 발견하고, 탐색하고, 알아 간다는 것. 보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삶의 범위로 끌어당기는 것. 가치와 의견을 만드는 것. ‘본다’라는 것은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한다.”(⟪이경희​ 개인전 : 비둘기는 어디에 있을까⟫의 작가 글) 작가에게 ‘본다’는 것은 발견하고 탐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했던 ‘봄’을 작품으로 풀어놓는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와 의견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작가는 뉴욕의 맥도널드에서 이 성조기를 ‘봤다’. 그 순간 미묘한 감정의 물결이 내면에서 넘실거렸다. 그 감정은 언어화할 수 없는 감각적인 것이어서 발신자(작가)가 정확히 발화할 수도, 수신자(청자)가 정확히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이 상황을 말했을 때, 나는 희미하게 피어나는 감정을 느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바라볼 때 드는 감정. 성조기가 그려진 유명 브랜드의 티셔츠와 모자를 볼 때, 성조기로 디자인된 휴대폰 케이스나 손가방을 볼 때,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볼 때, 광화문 광장의 시위대가 태극기와 함께 들고나온 성조기를 볼 때, 텔레비전 화면에서 한미연합훈련에서 나부끼는 성조기를 볼 때……, 그때그때마다 미묘하게 내면을 요동시키는 감정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성조기를 바라보는 감정에는 여러 층위가 존재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 층위는 세대마다 다르고, 추구하는 이념마다 다르다. 상황마다 감정의 세기도 다르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와 날 때부터 세계화를 경험한 세대가 성조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주한미군 수호 진영과 주한미군 반대 진영이 보는 성조기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성조기를 봤을 때 모두 공통적으로 내면에 동요하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은 같다. 그렇다면 이경희는 어떤 시선으로 성조기를 바라봤을까? 알 수 없다. 작가는 성조기를 이념적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어느 하나의 시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가 탐색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다. 빙산의 일각이 아니다. 이념의 밑에 존재하는 빙산의 몸체다.

이경희는 뉴욕의 맥도널드에서 봤던 ‘그’ 성조기를 전시장으로 소환하여 재가공한다. 그는 성조기가 지닌 표피적이고 관습화된 생각의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사실들을 자신의 시선으로 재조직한다. 우리는 작가가 그 성조기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재가공하여 전시장에 실현(實現)해 놓은 상황을 통해 그 감정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는 있다. 짐짓 짐작할 수 있는 이 감정은 ‘경외(동경)’와 ‘지배’, 그리고 ‘반투명’이다. 작가는 성조기를 밖이 훤히 보이는 전면 유리창으로 소환해왔다. 이 유리 벽면은 밖의 풍성한 빛이 찬란하게 비칠 뿐만 아니라, 지면에서 몇 계단 위에 있어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유리 벽면에 붙어 있는 성조기는 ‘경외(동경)’의 감정을 갖게 하기 충분하다. 게다가 그 형식은 중세 교회 건축에서 활발히 사용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고귀한 예술”로 칭해지게 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대학원에서 건축스테인드글라스를 전공했다.) 이러한 위치와 형식을 지닌 성조기(<움직이는 영토>)는 우리에게 ‘동경’, 혹은 ‘경외’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 형식은 이 작품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주요하다. 성조기를 투과해 전시 공간에 맺힌 빛 그림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그 몸체를 키우거나 줄이며 전시 공간을 ‘지배’하듯 천천히 움직인다. 빛의 잔상이 만들어낸 성조기의 분신은 이렇게 유유히 전시 공간을 떠돌며 공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한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반투명성’은 바깥 풍경을 완전하게 보여주는 것도, 완전히 차단하는 것도 아닌, 그 중간의 성격을 구축한다. ‘반투명’은 공개와 가림의 사이에서 이 둘의 특성을 모두 취한다. 혹은 모두 버린다. 우리는 <움직이는 영토>를 통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은 불완전하다. 보여주는 것도, 안 보여주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를 만들어 놓는다. 이렇듯 ‘그’ 성조기를 소환하여 재가공한 작가의 방식에서 ‘경외(동경)’, ‘지배’, ‘반투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움직이는 영토>에서 이러한 감정을 유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감정은 한 개인으로서 작가가 뉴욕의 어느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성조기를 보며 느꼈던 감정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조기로 상징되는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공통된 감정을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을 여전히 ‘경외(동경)’하는 감정. 한국 사회 구석구석 미국제일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 미국을 통해서 보는 ‘반투명’한 시선. 사실을 보여주지만, 진실을 감추고 있는 상황.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빙산에서 눈에 보이는 수면 위에는 성조기가 펄럭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에는 가늠할 수 없는 미국에 대한 미묘하고 복잡하고 거대한 감정의 몸체가 웅크리고 있다. <움직이는 영토>는 이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몸체 중 ‘이경희’라는 개인이 느꼈던 몇 가지의 감정을 가시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감정은 보편적인 것(고정적인 것/홈이 패인 것)일 수도, 특수한 것(유동적인 것/매끈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인 개인은 한국인 전체에 포함된다.

 

    개인의 삶으로부터 : 이데올로기의 균열된 지점

사실 이경희는 초기에 지극히 개인적 서사에 친착했다. 초기 작업인 ⟪종암동프로젝트⟫(2014)나 ⟪인수에게-你⟫(2015)는 작가 개인의 기억과 연관된 장소에 집중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몰입은 <경희여관>(2015)과 <흐릿한 꿈>(2015)에서 타인의 삶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면모를 보인다. 동시에 사회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찌르던 사실(기억)을 다루면서 개인을 경유하여 사회 중심의 문제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당시 발표했던 <이곳에 살기 위하여>(2015)는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사건의 아픈 기억을 개인의 서사로 드러낸 작업이고, <ABCD>(2016)는 삶이 부서진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안는 작업이었다. 더불어 <가엾은 박쥐여>(2016)와 <이 바닥(어서오십시오)>(2016)를 통해 작가는 한국의 정체성이 병리적 현상으로 드러내는 상황을 추적했다. 이러한 변화의 경로로 알 수 있듯이 이경희의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 범주에서 타인의 삶으로, 다시 사회적 기억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현재는 거대 이데올로기의 균열된 지점을 찾아 파고드는 모습을 보인다.

사건을 먼 거리에서 조망하며 ‘그럴 것이라는’ 추측, 혹은 ‘그러길 바라는’ 기대가 빚어낸 신념은 이데올로기로 직조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개인의 현실과의 괴리감이 존재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균열이 생긴다. 이경희가 파고드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서사(grand narrative)가 아니라, 균열과 같은 미시 서사(micro narrative)다. “나의 작업은 사회 속에서 개인의 문제를 조명하여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개인의 삶으로부터 사회 중심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작업노트)라고 밝혔듯이, 작가는 개인의 삶에 친착한다. 그가 친착하는 삶은 “사회 중심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이데올로기의 균열 지점이다. 작가는 그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 추측과 기대가 아닌, 개인의 현실과 대면한다. 개인의 삶 속에서 마주한 현실에는 당위도, 신념도, 이념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대면한 현실에는 이미 이데올로기의 간판은 불탔고, 타다만 귀퉁이만 조금 남아 있었다.

작가가 마주한 이러한 현실을 가장 잘 드러난 작업은 바로 한국전쟁 이데올로기의 균열 지점을 탐색한 작업이다. 군대의 주둔(특히 미군의 주둔)과 인근에 거주하는(했던) 일반인과 미군과의 미묘한 관계, 그들의 감정을 다룬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으로 ⟪No U.S Army there⟫(2016), 「경기북부마을아카이브프로젝트-연천 신망리」의 <No army there−Sinmangri> 및 <신망리 간판들>(2017), ⟪U.S. Army there⟫(2019) 등을 들 수 있다. (대상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작업으로는 ‘콸콸’이라는 시각예술 듀오[서효은, 이경희]를 구성하여 진행한 「월미도프로젝트」[2017~]가 있다. 이 작업은 전쟁, 식민, 이주의 역사를 가진 월미도 지역이 유흥도시로 변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프로젝트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 바로 이번 신작 <움직이는 영토>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데올로기에 생긴 균열의 틈새에서 살아가는 개인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는 『천 개의 고원』에서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유동하는 공간)과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정지된 공간)을 전자는 ‘매끈한 공간’으로, 후자는 ‘홈이 패인 공간’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사실상 혼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공간은 권리상 구분되어 있고, 이 구분이 혼합의 형식과 혼합의 방향(=의미)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상황이 도래한다. 

유비적으로, 정주적 공간, 즉 ‘홈이 패인 공간’은 이데올로기라고, 유목적 공간, 즉 ‘매끈한 공간’은 개인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현실은 상황에 따라 늘 움직이는 반면, 이데올로기는 당위를 설정하고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이 혼합되어 있다고 말했듯이,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현실도 혼합되어 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개인의 현실 속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개인의 현실이 이데올로기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개인의 현실에서 엇나가 있는 당위(이데올로기)의 비현실성을 현실에 맞추기 위해 뒤틀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균열이 생긴다. 우리가 보는 형상이 균열을 가진 이데올로기 덩어리인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뒤틀리고, 어긋나 있는 주요한 현장은 바로 한국전쟁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의 주요 구성 인자는 ‘반공’과 ‘정의의 수호자로서 미군’이다. 이 강력했던 이데올로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 주한미군 철수와 주한미군 수호로 나뉜 세력이 서로 대립 양상을 보일 정도로 큰 균열을 가지고 있다. 그 균열을 봉합하기 위해 주한미군 주둔을 점차 감축시키고 있지만, 이 때문에 새로운 균열이 진행되고, 그 균열들의 틈새에서 개인은 기이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이경희는 경기 북부 ‘동두천’ 미군기지 주변의 유흥지역에서 한국전쟁 이데올로기에 생긴 균열의 틈새에서 사는 개인을 처음 마주했다. 2003년 한미정상회담 이후 한국정부는 경기 북부 및 수도권에 있는 미군부대를 평택 캠프 험프리 기지로 이전하기로 하면서 이 지역의 미군기지를 반환하는 계획을 추진했고, 그로 인해 미군은 떠났으며, 미군을 상대로 한 상업지구는 공동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동두천은 2004년 주둔 미군 병력 50%가 이라크로 파병되면서 지역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이후 미군 부대가 평택기지로 옮겨가면서 미군의 소비를 기반으로 형성된 산업구조는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2016년 이경희는 자신이 마주한 틈새를 ⟪No U.S Army there⟫으로 우리에게 보여줬다. 

이 작업은 인터넷 사이트와 홍보형 명함, 그리고 그 명함을 미군기지에 닿게 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를 담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No U.S Army there(미군이 거기 없다)’라는 작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업은 ‘미군의 부재’를 중심으로 그것이 파생한 문제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국가적 차원이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조망한 것이 아니다. 그 내부로 들어가 허덕이는 개인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작가는 미군이 사라진 동두천의 유흥지역에서 지역민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풍경을 사진으로 담으며, 분위기와 정서를 읽어나갔다. 그가 채집한 말들, “거기 서 있으면 손님 안 들어와. 거 아가씬지 아줌만지 몰라도 사진기, 허락도 없이 가게 사진 찍는 미국놈들 내가 여러 명 후려갈겨 놨지.” “신랑을 미국사람 만나면 미국가야지. 안 그래?” 등의 말들 속에는 여전히 미군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작가는 이 말들이 미군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할 말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발화한 “목적지 없는 말들”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는 이 말들을 미군부대에 전하기로 마음먹고, 부킹(booking, 예약) 사이트를 만들고, 유흥업소에서나 사용할법한 홍보용 명함을 배포한다. 이 명함에는 “이 슬픈 세상을 짊어진 남자(A man who has shouldered this sad world)”에게 “정성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다짐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명함을 미군이 떠나버린 부대의 담장 너머로 던진다. 대부분 담장을 넘지 못한다. 설사 담장을 넘더라도 들어줄 이 없는 말들이다. 결코 목적지에 닿을 수 없는 말들. 이러한 작가의 행위는 동두천에서 여전히 사는, 이데올로기의 간판이 불탄 가게를 지키는 소시민의 모순적 상황을 드러낸다.

⟪No U.S Army there⟫가 ‘미군이 떠난 자리’를 다룬 작업이라면, 2017년의 <No army there―Sinmangri>는 폭을 조금 더 넓혀 ‘군인들이 지나간 자리’를 탐색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 작업도 ⟪No U.S Army there⟫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여기서도 미군이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찾아간 경기북부의 접경지역 ‘신망리’는 수복지역으로 수복 이전에는 북한군 치하에 있었다. 그래서 인민군에 관한 기억이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미군에 관한 기억이, 미군 철수 이후에는 우리나라 육군이 배치되어 육군에 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이렇듯 이곳은 인민군, 미군, 육군에 관한 기억이 중층적으로 병존하는 마을이다. 주민의 삶이 넓게 보면 전쟁과, 좁게 보면 군부대와 지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작가는 미군(UN군)의 원조로 건립된 구호주택 100채에 관련된 주민의 구술을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군, 미군, 육군이 마을 주민의 삶에 남긴 흔적을 함께 수집해 기록했다. 그리고 군부대로 인해 경기가 활발했을 때 제작됐던, 이제는 세월이 지나 빛바래고 닳은 간판들의 글자 테두리를 그대로 따와 원하는 색을 마음대로 덧칠할 수 있는 <신망리의 간판들>이라는 컬러링 북도 별책부록으로 만들었다.

앞서 밝혔듯이 신망리는 인민군, 미군, 육군이 차례대로 영향을 줬던 마을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미군의 구호주택’에 집중했다. 이것은 그의 관심이 여전히 ‘우리나라에서의 미군’임 알려준다. 그가 탐색하는 영역은 좁게는 한국전쟁과 미군과의 사이에 끼어 있는 암흑 지대이고, 넓게는 한국전쟁의 기억 위에 형성된 미국의 형상이다. 여기서 그는, ‘미국은 고마운 나라’라는 미국제일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그 근원(미군 주둔, 미군 원조)을 마주하면서, 이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차원에서 어떻게 발화되는지 탐색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맨 처음에 이 문장을 제시한다. “잘들어야들리는노아미데어신망리”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채록한 말을 잘 들으라고 말한다. 그래야 들린다고 이야기한다. 잘 듣는다면 뭘 들을 수 있을까? 채록한 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이 동네 모르는 게 없지. … 옛날엔 여기 앞에가 미군 천지였어. … 장사하니까 얘기도 다 해봤지. 할아버지. 그럼 아는 미군있어요? 몰라. 그냥 미군이야. 미군은 그냥 미군이지.” 잘 들으면 들린다. “미군은 그냥 미군”이었다. 신망리 주민에게 미군은 성도, 이름도 없는 “그냥 미군”이었다. 이건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에게 미군은 개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 수준의 관념적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은 없다. “미군은 그냥 미군”일뿐이다.

이경희는 이 ‘미군’이라는 관념적 형상에 모종의 이상함을 느낀 듯하다. 개인의 이름은 사라지고 집단적 기호만 남아있는 상황에 대한 기이함. 2019년 선보인 ⟪U.S. Army there⟫는 이런 문제의식을 표면화한 작업이다. 이 시리즈 작업은 작가가 한 명의 미군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특성을 관찰하고 기억한 후 그 기억만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제 미군을 직접 대면하기 시작한다. 관념적 형상이 아니라 현실의 개인을 만난 것이다. 작가는 한 개인의 특성들, 그의 몸짓, 태도, 개인적 상황 등을 관찰하면서 “미군은 그냥 미군”이라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이미지에 가려진 개인으로서 미군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이 시리즈의 첫 작업은 <You’re my best friend you know>다. 친근감 있고 활발한 남성 미군과의 인터뷰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이경희는 이 남성 미군과 인터뷰한 후 받았던 인상을 기초로 그의 형상을 손으로 그렸다. 그리고 미군의 홈페이지에 있는 전형적인 미군의 이미지를 흐르게 처리한 후, 손으로 그린 그의 초상을 그 위에 겹쳐서 작업으로 완성했다. 이는 정형화된 미군과 개인으로서 미군이 서로 다름을 형식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작업인 <Baby meal>에서는 거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 작업은 아이가 있는 여성 미군의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여성 미군은 인터뷰하는 동안 줄곧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목이 ‘Baby meal(아기 식사)’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아이에 대해 걱정하는 여성 미군은 여느 엄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인터뷰에 집중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그의 얼굴은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여성 미군의 형상을 온전히 제시하지 못했다. 형체가 희미하다. 이러한 개인으로서 미군의 모습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형적인 미군과 확연히 다르다. 작가는 관념적 형상과 실제적인 개인의 삶이 어긋나 있는 지점을 보여줌으로써 선입견을 만들어내는 거대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그 균열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이끈다.

이경희는 최애 소설로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면도날(The Razor’s Edge)』(1944)을 꼽았다. 이 작품은 사회 구조가 만든 상류 문화를 추구하는 개인들의 심리적 풍경과 그 길을 가지 않는 인물에게서 드러나는 구도자적인 삶의 모습을 풀어놓은 소설이다. 여기서는 성공이라는 거대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여러 인물이 자신의 삶을 변주해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이 때문일까? 그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혹시 사회가 제시한 성공 이데올로기 안에서 복작대는 개인들의 다양한 모습 때문일까?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경희는 추측과 기대의 신념이 직조한 이데올로기와, 이 이데올로기가 현실과 맞지 않아 뒤틀리며 발생하는 균열과, 그 틈새에 낀 개인의 심리적 풍경을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다. 마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

​(제주현대미술관 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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