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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에 닿을 수 있는 먼지

안진국(미술비평)

 아서 단토는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의식의 외화라면 그것은 우리가 예술가가 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고 말했다.(『일상적인 것의 변용』, 김혜련 옮김, 한길사, p.346.) 나는 이경희의 작업을 보면서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본다. 그는 자신을 찌르는 사실(기억)을 마음에 품고 오랜 시간 되뇌면서 그 기억 주위를 사유의 막으로 겹겹이 감싸 반짝이는 작업을 내놓는다. 마치 조개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수백 겹의 외투막으로 감싸 결국 반짝이는 진주를 만드는 것처럼 작가도 그렇게 작업을 한다. 1살 때 할머니에 의해 서울로 ‘강제 이송’된 가족사는 30여 년이 지나 약간의 다른 내러티브를 가진 <종암동 프로젝트-종암동 머물기>(2014)와 <풍경소리 (Voice of landscapes)>가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은 이런 환상을 머금고 꿈의 들판으로 갈 수 있는 <경희여관>(2015)을 만들어냈다. 이별과 사라짐, 그리고 흐릿한 기억에 대한 안타까움은 오랜 시간 마음 깊은 곳에 침전되어 <흐릿한 꿈>(2015)과 《인수에게-你》(2015)가 되었다. 2015년부터 이경희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찌르던 사실(기억)을 다루기 시작하여,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사건의 아픈 기억을 품은 《이곳에 살기 위하여》(2015), 삶이 부서진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안는 <ABCD>(2016), 한국의 정체성이 병리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현상을 추적한 <가엾은 박쥐여>(2016)와 <이 바닥(어서오십시오)>(2016), 미군과 미군기지, 그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다룬 <No U.S Army there>(2016) 등의 작업을 선보였다. 2017년에는 《Essay / Do extract for one essay》를 통해 잠재의식 속에서 작가를 감싸고 있던 ‘바다’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콸콸’이라는 시각예술듀오(서효은, 이경희)를 구성하여, 전쟁, 식민, 이주의 역사를 가진 월미도지역이 유흥도시로 변하는 과정을 추적한 「월미도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쟁 역사의 어긋난 지점을 단단한 언어로 말하고 있다. 더불어 개인 작업으로 2016년 독일 베를린 레지던시 기간부터 마음에 각인되기 시작한 ‘비둘기’에 대한 기억을 되뇌며 작가의 지난 삶에서 비둘기를 소환하여 그것을 겹겹이 감싸는 중이다. 아마도 멀지 않아 이러한 작가의 거듭된 사유가 단단하고 반짝이는 작업으로 세상에 등장할 것이다.

 FIN : 모든 희망과 욕망의 무덤(the mausoleum of all hope and desire)

보호관찰소에 갇혀 있는 앙트완은 체육활동 시간에 갑자기 철조망 담장 밑으로 기어들어가 관찰소를 탈출한다. 그는 쉼 없이 달린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바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곳. 하지만 앙트완은 발목이 잠길 정도밖에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 소년은 결국 뒤돌아서서 바다를 등지고 해변으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FIN”. 영화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400] Coups)>(1959)는 이렇게 끝난다. 이 영화에서 부모의 무관심과 학교의 억압적 구조, 사회적 위선 등 사회적 폭력과 갈등을 겪는 열네 살 소년 앙트완은 끊임없이 자신을 가두는 공간을 탈출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서 자유의 공간, 해방의 장소처럼 여겨지는 바다에 도착한다. 하지만 바다는 앙트완에게 넘을 수 없는 한계, 실존적인 경계선이 되어 소년을 더 달리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이 영화는 이경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2017년 상반기에 바닷가 근처에 있는 홍티아트센터(부산문화재단)에 입주하여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동안 자신의 심연에 침전되어 있던 ‘바다’를 흔들어 부유시켰다. 장소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에게 바다 근처의 레지던시는 바다를 뒤적거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소가 되었으리라. 사실 바다는 작가의 삶과 맞닿아 있다. 작가가 태어난 곳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제주도이고, (1살에 서울로 강제 이주되었지만, 성장하면서 개인적인 이유로 장기간 제주도에서 생활했다.) 성인이 된 지금은 바다가 가까이 있는 인천지역을 활동의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다. (작가는 ‘콸콸’의 작업으로 「월미도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내면을 탐구하는 이경희에게 바다 작업은 어쩌면 언젠간 하게 될 작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레지던시에서 수백 편의 영상을 봤다. 그 과정에서 바다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음을 발견했다. 바다에서 사랑을 나누고, 전쟁을 벌이고, 난민으로 떠돌고, 살인하는 등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영상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경희는 자신이 본 영상에서 바다 이미지를 추출하여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런데 작가가 제시한 바다 이미지는 바다의 색보다 더 새파랗거나 너무 검다. 작가는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1929)에 나온 “너에게 모든 희망과 욕망의 무덤을 준다.(I give you the mausoleum of all hope and desire.)”라는 경구를 떠올리며, 바다를 ‘모든 희망과 욕망의 무덤’이라고 정의 내린다. (작가는 미국드라마 「워킹데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에 큰 울림을 받았다고 한다.) 바다를 ‘세상의 끝’으로 보는 것이다. <400번의 구타>에서 소년이 갈망했던 바다는 결국 소년의 전진을 가로막는 경계선이었다. 바다는 소년에게 ‘세상의 끝’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이 바다를 등지고 섰을 때 “FIN(끝)”이 새겨지고 영화가 끝이 났으리라. 이경희는 이 장면을 주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작업으로 가져왔다. 이것은 바다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알려준다. 이경희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다는 인간의 한계, 세상의 끝, 무덤이다. 실재적인 물리적 죽음뿐만 아니라, 은유적인 사회적 죽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인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죽음은 작가의 전시장에 있는 환등기처럼 오래되었고, 환등기 위에 놓인 한 장의 OHP 필름에 인쇄된 관련성 없는 두 장면처럼 맥락도 없고 우연적이다.

 삶의 제의(祭儀)

“의자 같은 경우는 …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하지만 움직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같은 인상이 있어요.”(작가와 인터뷰 중) 이경희는 어떤 사물을 선택할 때도, 볼 때도, 촬영할 때도, 그릴 때도 그 사물에 묻어 있는 사람의 체취를 찾는 모습을 보인다. 너무 많이 앉아 주름지고 축 처져 있는 소파, 가볍게 휘날리기엔 너무 무거워 보이는 깃발, 네 발이 휘어 있어 앉으면 바로 주저앉을 것 같은 의자, 거친 그림자를 가진 깔끔한 유리병, 정돈된 보도블록 위에 오려 붙여 놓은 것 같은 공사 표시콘, 한쪽으로 밀려서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폐박스들. 작가가 보여주는 사물들은 사람들의 남루한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느낌이다. 사물을 볼 때도 그의 시선은 사람을 향해 있다. 이처럼 이경희의 사람에 대한 애정은 작업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흐른다.

작가는 초라한 사람의 내부를 따뜻한 시선으로 매만진다. 특히, 리서치의 결과가 예술적 표현형식과 결합한 작업은 작가가 심리적으로 어떻게 사람을 끌어안는지 알려준다. ‘약속다방’의 주인이었던 한 여인이 아무 말 없이 홀연히 떠난 사건을 토대로 삼은 <흐릿한 꿈>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떠나는 한 여인의 심정을 담아 약속다방에서부터 큰 도로까지 걸어가며 신발을 도로 쪽을 향해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방으로 되돌아올 때는 여인이 다시 돌아오길 염원하며 내려놓은 신발을 다방 쪽으로 돌려놓았다. 마치 도로를 향한 신발들은 홀연히 떠난 여인의 발걸음처럼 느껴지며, 다방을 향해 돌려진 신발들은 그 신발들을 밟고 그 여인이 다시 약속다방으로 돌아올 것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배경으로 기획된 전시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도 작가가 섬세한 감정으로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참사를 직접적이고 선정적으로 드러내는 폭력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게 만들어 놓은 양철 통로를 설치하고 그 끝에서 개인의 분열된 기억과 책, 불과 물 등을 상징하는 장면이 교차하는 영상을 상영하여 참사에 대한 심리적 형상만 제시한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기억하는 이는 점점 좁아지는 양철 통로와 영상에 등장한 불타는 장면, 검게 그을린 여인의 손 등을 통해 그 화재 참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화재 참사의 기억과 영상 속의 물의 이미지, 물에 흠뻑 젖은 여인이 연결되면 안타까운 참사인 ‘세월호 사건’을 상기(想起)하게 된다. 특히 작가는 대구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시 <이곳에 살기 위하여(Pour vivre ici)>를 영상의 내레이션으로 넣음으로써 작업을 더욱 은유적으로 만든다. (이 시는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는 “나는 불을 만들었다”, “나는 흐르지 않는 물속에 침몰하는 선박”, “피를 찢는 창백한 손”, “불의 한 방울이 차가운 물 위에 뜨고” 등의 구절을 통해 불과 물, 폐허, 피, 죽은 자, 눈물과 같은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제시되는데, 그것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와 세월호 사건과 내적 연관성을 형성한다. 이렇게 이경희가 사회적 재난을 불러오는 방식은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 특히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당사자들을 사려 깊게 배려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당사자들은 참사를 직접 재현한 모습만으로도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게 된다.) 작가의 사람에 대한 배려는 작업의 형식이 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곳에 살기 위하여>를 진행하며 메타 작업으로 제작한 <ABCD>에서 그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 작업은 입장과 상황이 다른 네 명의 사람이 전혀 소통되지 않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하나의 총체적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형식의 영상 및 설치 작업이다. <ABCD>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영상과 텍스트, 그리고 서로 다른 형태의 의자 조각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의자를 구성하는 작품을 통해, 한 명 한 명의 객체가 지닌 특성과 그들이 구성하는 세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형식은 우리에게 이경희가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사려 깊게 접근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2016년 《격변! 미지로부터 코레아》 전시에서 선보인 <No U.S Army there> 명함과 홈페이지, 영상 작업은 작가에게 한국 전쟁과 미군의 개입이 우리에게 남긴 것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에서부터 이경희는 대문자 역사보다는 전쟁의 잔흔에서 사는 소시민의 삶과 사회 구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는 <No U.S Army there>를 제작하면서 리서치한 ‘동두천’과 예술듀오 콸콸의 「월미도프로젝트」를 위해 리서치한 ‘인천’, ‘마을조사’라는 다소 목적성 있는 사업인 「서부전선 DMZ 프로젝트」를 위해 리서치한 ‘연천 신망리’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미군과 한국인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발견하였다. 현재 작가는 이 다른 방식의 연유(緣由)와 파장, 그리고 변화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아마도 머지않아 이에 대한 사유가 겹겹이 쌓인 단단하고 반짝이는 작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경희의 작업은 모든 곳에 닿을 수 있는 먼지와 같다. 우리는 늘 먼지 없는 무균실을 꿈꾼다. 하지만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공간에는 먼지가 존재한다. 먼지는 모든 곳에 닿을 수 있다. 지금도 이경희의 작업은 사람 사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공간을 떠다닌다. 둥둥. 그리고 계속 떠다닐 것이다. 둥둥.(끝)

​홍티아트센터 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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