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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선영(미술평론가)

  

 그림부터 텍스트까지, 스테인드글라스부터 영상까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이경희는 작품 속에 장소와 기억, 그리고 이야기를 담는다. 작가는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소설을 쓰고 퍼포먼스를 하고, 영상과 사진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삶의 편린들을 담는다. 작가는 늘 하고 있던 것을 작업으로 만든다. 조각과 회화는 물론 화학과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여러 분야를 전공으로 거쳐 왔고, 가창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 지금 중국에서 또 다른 체험을 쌓고 있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좌표계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의 상황들이다. 한 자리에서 하나만 보고 하나만 생각하는 양 하나의 매체로 줄기차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도 있지만, 이경희의 작업들은 파편화된 분업사회에서 유리한 고지에 이를 수도 있는 이러한 외골수 전략과 거리가 멀다.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스타일의 작가에게 흔히들 ‘유목’이나 ‘탈주’라는 시대의 키워드를 사용하곤 하지만, 그런 용어들은 너무 느긋하거나 너무 급박하다. 이게 아닌가 싶어서 다른 것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빠르고, 긴 우회로를 거치면서도 결국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느릿하다.

 분명한 것은 한자리에서 하나의 일에 견딜 수 없을 때 떠나고, 떠나도 결국은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이에게 예술이라는 분야는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때로 그 자리가 너무 넓어서 무의미에 가깝다할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예술이 주어진 코드에 충실하기만 한 ‘우등생’ 보다는 ‘문제아’에 의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다 만듯한 그림, 결론 없는 이야기, 언제 생산된 것인지 모를 수집품들이 오래된 살림살이처럼 놓여있는 이경희의 전시들은 시각성을 매개로 하는 완결된 형식미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보이는 것을 넘어서 들려주려 한다. 시각이 곧잘 하나의 지점에 고정되는 것에 비해, 청각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을 수용한다. 그것은 작가가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 갈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미술보다는 소설이나 시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물론 이경희는 틈틈이 글도 많이 쓰고 전시회에는 그 텍스트가 반영되며, 더 나아가 글쓰기는 작품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그리고 글처럼 시간성에 호소하는 영상도 주된 매체다. 작품목록에는 핸드북이나 오디오 북 같은 방식도 있다. 

 

 보이지 않는 텍스트 작업은 보이는 시각예술에 비해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 머무름보다 이동이 더 많은 삶을 살아왔다면, 글쓰기는 조각난 시공간을 채우고 연결하는 긴밀한 형식일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 인과성과 분리불가능한 시간적 연속성은 또 다른 압박을 주곤 한다. 이경희의 작품은 공간성에 호소하는 것이든 시간성에 호소하는 것이든, 완결된 하나를 던져 놓지 않는다. 관객 앞에 풀어야할 수수께끼처럼 제시된 작품들은 작가의 지각과 기억에 바탕 하지만, ‘그것은 ~~~였다'나, 나는 ~~~했다'는 식의 과거완료형 어법과는 거리가 있다. 이경희에게 작업은 단지 보이는 것을 넘어선 일종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관된 의미의 장은 아니다. 일관된 의미가 부여된 이야기는 가령 여류명사의 수필집이나 연속극의 대사, 독백, 또는 흔히들 상식에 호소하는 글쓰기에서 많이 발견되며, 주어와 과거형 서술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닫혀있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공간에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그림+오브제+텍스트+영상 등의 복합물은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배열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과 고리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사물들로 엮어내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이경희의 작업이 기억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위상은 크다. 양자의 관계는 내재적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기억은 어떤 학문 분야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어떤 영역에서도 온전하게 그것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런데 예술자체가 바로 이러한 모호한 영역에 자리하기에, 기억과 예술의 관계는 밀접한 것이다. 기억은 시간이라는 범주에 기대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간격은 커진다. 이 간격은 연속적으로 이해되는 선적 이야기를 단절시키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읽기와 쓰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경희의 최근 작업인 [종암동 프로젝트]는 무려 1살 때(1982년)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적 스케일을 가진다. 그래봤자 30년 조금 넘지만, 세계 제일의 IT 강국이자, 지난 시공간을 파괴하면서 빠르게 발전해온 토건국가의 시간 감각에 비한다면 짧지만도 않은 시간이다. 작가가 말하듯이 ‘낡았는데 없어지지 않은 것’, ‘남아있는 것’에서 이야기를 끌어내기에, 작품은 개인의 이야기이자 역사가 된다. 그러나 개인사이든 집단의 역사이든 과거를 정확히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기억하기 힘든 유년기 뿐 아니라, 대구 지하철 사고처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조차 그렇다. 누군가 어떤 사건을 기억하려는 것은 실제로 그만큼 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려는 자는 시간과 공간을 역류해야 하며, 이러한 역류는 이미 아는 길이 아니라, 미지의 곳으로의 모험이다. 인상 깊은 장소에서의 퍼포먼스가 곁들여지는 이경희의 작업은 재현이 아니라, 재연이다. 재현이 동일자의 기계적 반복에 머문다면, 재연적 반복에는 차이가 따른다.

 그것은 스토리와 배우가 같아도, 무대(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연극이다. 그것은 미지의 시공간의 축을 따라 지각과 기억이 활성화되는 연극적 예술이다. 미니멀리즘이 보여주듯, 연극성은 완결된 형식미와 의미에 치중하는 예술보다는, 몸과 무의식, 그리고 사물을 부각시킨다. 개인사로 보자면 거의 선사시대에 해당될 시간대를 택한 것은 그녀의 작업이 역사보다는 ‘고고학 또는 계보학’(미셀 푸코)과 더 가까울 것임을 예시한다. 작가는 관념적으로 빈 곳을 그럴듯하게 엮어 나가기보다는, 난데없는 사물들을 등장시켜 그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추리하게 한다. 11살 때라면 몰라도 1살 때를 제대로 기억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원래 제주출신으로 1살 때 서울로 ‘강제 이송’된 가족사가 있었고, 그 중심에 할머니가 있었다. 작가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다소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림 속의 할머니도 별로 인자한 모습은 아니며, 마치 혼백을 그린 듯 그로테스크까지 하다. 할머니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완전히 동일시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는 할머니가 즐겨 입었던 옥색 치마저고리를 맞춰 입은 작가가 어릴 때 살던 동네 곳곳을 종횡무진 쏘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빙의(憑依)된 것 같은 작가의 퍼포먼스와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사물들--옛집의 타일들, 등, 브라운관, 시계, 할머니 유품들--그리고 사진과 그림 등으로 연출되고 재연된 장면은 희미한 기억보다 더 강력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유년기의 이미지이다. 작가는 채석장, 시장, 교회 등, ‘간신히 생각나는 기억’부터 ‘기억 할 수 없는 기억’까지를 담아내려 한다.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없던 존재와 장소는 작가인 내가 재조합한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친숙한 장소, 다가가고 싶은 존재로,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작가노트)로 남겨진다. 직접 할머니 옷을 걸치고 진행한 행위들은 대화적이다. 이경희에게 이 대화의 매개는 아직 큰 변화가 없는 동네의 공간들과 자신의 몸이다. 특히 몸은 장소와 기억을 매개한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몸이 그자체가 일종의 매체이며, 몸은 습관화를 통해 기억을 고정하고 정열의 힘을 통해 그것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아스만에 의하면 몸속에 저장된 기억이 의식에 의해 전적으로 단절되었을 경우 이를 트라우마라 하는데, 이 맥락에서 보자면 이경희의 작업에서 몸을 매개로한 기억의 과정은 치유적 의미도 가진다. 작가는 단지 타자를 나와 동일시하는 것을 넘어서, 작가 자신이 타자로 변신한다. 예술을 포함하는 어떤 사건을 벌이는 이는 자신이지만, 그러한 사건을 보는 이도 자신이다. 아득한 기억을 주제로 하는 이경희의 작품에는 분열이나 분신의 테마가 있다. 작가는 자신 안에 수많은 타자를 가진다. [종암동 프로젝트]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진 어떤 사건을 단초로 하지만, 작가는 자기보다 타자가 더 막강하게 힘을 발휘하는 유년기에 매혹된다. 그것은 예술이 언제나 타자에 대한 그리움과 타자와의 대화로 진행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경희는 ‘현실에서 타자는 경계 대상이지만, 작업 속에 들어올 때 그것들은 받아 들여질만한 과정이 된다’고 말한다. 이때 예술은 삶과 화해하고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된다. 

  

출전;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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